광주 수변길 밤 산책과 맥주 한 캔

낮의 광주는 분주하다. 금남로의 신호등은 예민한 사람의 호흡처럼 빨갛게, 초록으로 번갈아 뛰고, 문화전당 앞 잔디광장은 약속과 전화와 배달 오토바이가 얽힌 작은 소용돌이다. 저녁이 지고, 강과 저수지, 하천과 호수로 뻗어 있는 수변길이 차례로 조명을 켤 때쯤, 도시의 긴장이 조금씩 풀린다. 거기서 맥주 한 캔을 꺼내는 일은 별것 아닌 듯하면서도 묘하게 의식처럼 느껴진다. 소리 대신 냄새로, 속도 대신 온도로 하루를 정리하는 시간이다. 나는 광주에서 몇 해를 살았고, 퇴근이 늦거나 머릿속이 산만해지는 날이면 자주 수변길을 찾았다. 이 글은 그때의 발길이 쌓은 지형도이자, 뒤늦게 익힌 밤 산책의 요령과 작은 발견들에 대한 기록이다.

어느 밤의 좌표, 영산강에서 시작하기

광주에서 가장 큰 물줄기는 영산강이다. 도시 서쪽을 느릿하게 휘돌아 남하하는 강은, 같은 도시라도 시간대에 따라 표정이 달라진다. 해가 지고 강변이 긴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면, 달빛과 가로등이 번갈아 수면을 긁는다. 풍암동 쪽에서 시작해 승촌보 방향으로 걷는 구간은 바람이 정면으로 들어오는 날이 잦다. 물 냄새가 질척일 것 같지만 물길이 넓고 유속이 완만해서인지 오히려 금속성 냄새가 희미하다. 겨울에는 볼이 얼얼해지고, 여름에는 옆에서 잠자리들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간다.

강변 산책로에는 보폭을 맞추기 좋게 흰 선이 칠해져 있다. 자전거와 보행 구간이 분리되어 있어 편하지만, 밤에는 자전거 속도가 빨라지니 한 번쯤 뒤편을 확인해 주는 습관이 안전을 지킨다. 나는 강변 마켓에서 맥주 한 캔을 산 뒤, 휴지와 작은 봉지, 얇은 패커블 방석을 챙긴다. 방석은 과하게 보일지 몰라도, 강변 콘크리트 난간이 의외로 차게 식어 있어 10분만 지나도 다리가 금세 싸늘해진다. 맥주는 355ml 한 캔이면 충분하다. 강바람을 맞으며 마시는 술은 도수가 빨리 오른다. 나는 처음 몇 모금은 그냥 넘기고, 그 뒤에는 한 모금을 혀끝에 살짝 올려둔 뒤 삼킨다. 알코올보다 탄산과 홉 향이 먼저 올라오고, 그 사이에 바람이 목구멍을 식힌다.

강을 따라 걷다 보면 조명 아래 날벌레 무리가 일시적으로 뭉치는 구간이 있다. 쏠림 현상은 특히 습한 밤에 두드러진다. 그럴 때는 조명 바로 아래를 지나기보다, 빛이 희미해지는 테두리를 타고 걷는다. 별것 아닌 회피 동선 하나로 옷에 달라붙는 번거로움을 줄인다. 합수부 근처에는 물살 소리가 굵다. 맥주를 반쯤 남겨둔 채로 그 소리에 딱 맞춘 속도로 발을 옮기면, 걸음과 심박이 동기화되는 느낌이 든다. 목적지 없이 걷는 밤에는 이런 작은 리듬이 방향을 대신한다.

풍암호수공원, 호수 가장자리의 둥근 시간

풍암호수공원은 광주에서 밤 산책으로 가장 안정적인 선택지다. 호수 둘레길은 대략 3.2km, 빠르게 걸으면 35분, 천천히 돌면 한 시간 조금 넘는다. 바닥은 고른 포장이고, 구간마다 벤치가 충분히 놓여 있다. 가족단위가 많아도 밤 9시가 지나면 발걸음이 느슨해진다. 호수 중앙의 분수는 계절과 시간대에 따라 운영이 달라지지만, 작동하는 밤이면 수면 위로 뿜어 오른 물기둥이 주변 소음을 눌러 준다. 이런 백색소음은 생각을 덜 뾰족하게 만든다.

호수 수변에 앉을 자리를 고를 때 나는 조명과 시야각을 먼저 본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동선을 정면으로 마주 보는 자리보다, 30도쯤 비껴나는 자리가 편하다. 정면은 시선이 너무 자주 맞게 되고, 완전히 등을 돌리면 뒤가 신경 쓰인다. 비껴 앉으면 인사도, 회피도 수월하고, 맥주를 마실 때 어색함이 덜하다. 풍암호수에서는 캔을 따는 소리 하나에도 누군가의 눈길이 잠깐 붙는다. 그런 소소한 시선을 막아 주는 건, 놀랍게도 호수에 비친 조명 반사다. 물 위로 길게 끌리는 빛이 시선을 흡수하고, 사람들은 대개 그 반사를 본다. 내 손에 들린 캔은 초점 밖으로 밀려난다.

늦여름 어느 밤, 호수 남쪽 둔덕에서 자리를 잡았을 때였다. 옆 벤치에 앉은 중년 부부가 과자를 나눠 먹으며 말없이 물결을 보고 있었다. 남자는 캔을 반쯤 들었다 놓고, 몇 번이나 다시 손을 뻗었다. 미세한 갈등이 손목에 나타났다. 결국 그는 캔을 열고 한 모금을 마셨다. 그 뒤로 둘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호수를 한 바퀴 더 돌고 돌아와 자리를 바꿔 앉았다. 그 작은 동작이 말보다 많은 걸 알려준다. 밤 산책은 화해의 최단거리일 때가 있다. 조명, 물, 한 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격을 조절하는 데 이보다 더 간단한 조합도 드물다.

동천과 광천천, 생활 반경의 물길들

도시의 하천은 일상과 가장 가까운 물이다. 동천은 수완지구에서 장등동 쪽으로 이어지는 길이 편하다. 직선 구간이 많고, 다리 간 간격이 일정해서 페이스를 유지하기 좋다. 퇴근하고 향한 밤 10시쯤, 사람은 거의 없고 가끔 조용한 전동킥보드가 지나간다. 하천에 내려서는 램프 구간이 길지 않아 오르내리기 수월하고, 몇몇 구간에는 운동기구가 비치되어 있어 어깨를 푸는 데 도움이 된다. 손에 든 맥주를 벤치 아래 그늘에 잠깐 숨겨 두고, 어깨 스트레칭을 1분만 하고 돌아와도 맛이 달라진다. 근육이 풀리면 체온 분포가 변하고, 같은 맥주가 좀 더 부드럽게 넘어간다.

광천천은 서방시장 쪽으로 내려서는 길이 좋다. 팔달교 인근에서 냄새가 조금 날 때도 있지만, 비 온 뒤에는 물빛이 맑아지고 소리가 깨끗해진다. 이 구간은 나무가 많아서 여름에는 벌레가 더 들끓는데, 대개는 빛 아래에 모이므로 조명 사이를 건너뛰듯 걷는다. 광천천변에서 자주 보는 장면은 혼자 걷는 학생과 통화 중인 누군가다. 비슷한 속도로 걷다 보면 통화 내용의 끝부분이 귀에 들어오곤 한다. 시험 얘기, 야근, 반려견 병원 예약, 그런 흔한 이야기들이 왠지 밤에는 덜 무겁게 들린다.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한쪽 귀는 물 소리에 열려 있기 때문이다. 물소리와 인간의 말소리가 겹치는 곳에서는 감정의 모서리가 둥글어진다.

하천길의 매력은 반복에 있다. 다리의 간격, 계절별 물빛, 고개를 들면 항상 그 자리에 있는 아파트 외벽. 반복은 지루함이 아니라 비교의 원천이 된다. 어제보다 오늘의 바람, 지난주보다 이번 주의 수위, 작년 같은 날의 온도. 그 비교가 쌓이면 생각의 속도가 줄고, 판단이 단정해지지 않는다. 맥주 한 캔은 그 느린 비교에 맞는 속도다. 한 캔이 두 캔이 되는 순간, 비교는 풀리고 생각은 둔탁해진다. 나는 하천에서는 거의 늘 한 캔만 들고 나간다.

빛과 그림자, 밤 산책의 디자인

수변길의 조명은 의외로 섬세하다. 높이 3m 안팎의 저조도 보행등이 일정 간격으로 놓여 있고, 일부 구간에는 난간 조명이 추가된다. 이 조도는 독서를 하기에는 부족하지만 표정을 알아보기에는 충분하다. 사람을 보호하되, 생각의 그림자를 남길 정도의 여유를 준다. 사람은 완전한 밝기보다 불연속의 밝기에서 안심을 느낀다. 빼곡한 조명 아래에서는 자신의 실루엣이 지워지고, 어두운 구간에서는 외부의 감시가 완전히 사라진다. 두 상태의 교차가 긴장을 갈무리한다.

비가 그친 직후 수변길의 조명은 두 배로 밝아 보인다. 젖은 바닥이 반사판 역할을 하면서 발밑이 한 톤 올라간다. 이때 마시는 맥주는 최대한 천천히 들이켜는 편이 좋다. 시각 헬로밤 정보가 풍부해진 만큼 미각이 상대적으로 둔해지는데, 서두르면 알코올이 먼저 앞서간다. 캔을 들고 있는 손의 온도를 체크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손등이 바람에 식어 간다면 체온 손실이 빠르다는 뜻이고, 그때는 걸음을 조금 더 빠르게 하거나, 캔을 다른 손으로 옮겨 균형을 맞춘다. 작은 조정들이 전체 경험을 바꾼다.

가끔은 조명이 고장 난 구간이 있거나, 반려견을 목줄 없이 데리고 나온 사람이 있다. 익숙한 수변길이라도 긴장을 놓지 않는 편이 좋다. 조용한 밤일수록 예기치 않은 변수가 또렷하게 다가온다. 바람이 방향을 바꿨을 때 흙냄새가 더 진하게 올라오면, 근처 둔치에서 누군가 뛰고 있다는 신호일 때가 많다. 발놀림이 강변 흙을 휘저으면 향이 바뀐다. 무릎이 예민한 날에는 이런 냄새 변화가 피할 타이밍을 알려준다.

캔 하나의 무게, 취기가 아니라 흐름

맥주 한 캔은 350g 남짓이며, 들고 걸을 때 무게보다 부피감이 더 신경 쓰인다. 손이 바쁘면 생각이 단순해지고, 단순해진 생각은 몸의 리듬을 따라간다. 산책 중 마시는 술은, 취하려고 마시는 술이 아니다. 모서리를 둥글게 만들고, 들어올린 어깨를 한 칸 내리기 위한 장치다. 밤 산책을 오래 하다 보면, 한 캔의 역할이 알코올이 아니라 속도 조절이라는 걸 체감하게 된다. 한 모금을 넘기고, 두 걸음을 내디디고, 세 걸음째에 숨을 내쉰다. 입안의 탄산이 기도 끝에 닿을 즈음, 발바닥의 감각이 되살아나고, 시야가 조금 뒤로 물러선다. 낮에는 앞을 본다. 밤에는 앞의 뒤를 본다. 조명 뒤의 그림자, 사람 뒤의 의도, 물결 뒤의 바람. 그 뒤쪽을 보는 데 맥주 한 캔이 도움을 준다.

예민한 사람이라면, 캔을 따는 순간의 소리를 줄이는 요령을 배워 두자. 탭을 들어 올릴 때 완전히 젖히지 말고, 절반쯤 걸쳐 이산화탄소가 서서히 빠지도록 만든다. 손가락을 덮어 폭발음을 절반으로 줄이면, 주변의 동물도 덜 놀란다. 이 작은 예의는 밤 산책의 질을 좌우한다. 소음이 적으면 눈길도 적고, 눈길이 적으면 마음도 편하다.

도시의 예절, 공공과 개인 사이

수변길의 밤은 공공의 시간이다. 맥주 한 캔을 들었을 때, 내가 가장 신경 쓰는 건 냄새와 쓰레기다. 캔은 내용물을 모두 비운 뒤 가볍게 흔들어, 남은 거품이 흘러나오지 않도록 한다. 가끔 맥주 냄새가 벤치에 묻어 다음 사람에게 불쾌감을 준다. 야간 산책객 대부분은 쓰레기통 위치를 안다. 하지만 쓰레기통이 가득 차 있거나, 뚜껑이 닫혀 있을 때가 있다. 이럴 때는 잠깐 번거로워도 빈 캔을 다시 들고 걷는다. 맥주 캔은 대체로 손을 더럽히지 않고 접을 수 있다. 윗부분을 약간 찌그러뜨려 부피를 줄이고, 가방 측면 포켓에 넣으면 이동이 수월하다. 그렇게 한 번 제대로 처리하면, 다음에도 자연스럽게 같은 행동을 하게 된다. 나쁜 습관도 급속히 번지지만, 좋은 습관은 서서히 오래간다.

또 하나의 예절은 시선 처리다. 밤에는 표정이 읽히지 않아 오해가 쉽게 생긴다. 지나치며 짧게 고개를 끄덕이는 건 괜찮지만, 오래 바라보는 건 상대에게 부담이 된다. 반려견과 함께 걷는 사람을 만나면, 개와 눈을 맞추는 대신 주인의 발밑을 보는 게 안전하다. 반려견은 눈 맞춤을 신호로 오해할 수 있다. 특히 수변길처럼 공간이 좁은 곳에서는 시선의 방향이 동선의 의지로 읽힌다. 내가 그들을 향해 가는 건지, 그저 같은 방향으로 걷는 건지, 두세 걸음이면 갈림이 생긴다.

밤에 듣는 물소리, 생각의 여백 만들기

광주의 수변길은 의외로 소리의 종류가 다양하다. 강은 중저음, 하천은 중음, 호수는 거의 무음에 가깝다. 분수대나 보 근처에서는 중고음의 백색소음이 생기고, 다리 위에서는 타이어가 미세한 고주파를 만든다. 나는 가끔 이어폰을 귀에 꽂고도 음악을 틀지 않는다. 이어폰 자체가 음향의 차단막이 되어, 바깥 소리가 필터링된다. 그러면 물소리만 얇게 들어오고, 그 얇은 층 위에서 생각이 미끄러지듯 흐른다. 이런 간접 청취는 맥주를 마실 때도 도움이 된다. 혀에 닿는 자극이 소리와 균형을 이룰 때, 취기가 아닌 안정감이 먼저 온다.

한겨울 밤, 영산강 자전거길을 걸을 때, 얼음밭을 밟는 듯한 소리가 난 적이 있다. 바람이 매서운 방향으로 바뀌면 풀잎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유리처럼 울린다. 그날은 맥주 대신 뜨거운 보리차를 들고 나왔지만, 같은 걸음을 다른 음색으로 채웠다. 취기 없이도 밤 산책은 충만하다. 맥주를 고집할 필요도, 금할 이유도 없다. 다만 내 몸과 밤의 합을 맞추려면, 자극의 개수를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 소리, 맛, 바람, 빛. 네 가지 중 하나라도 과하면 나머지가 묻힌다. 균형이 핵심이다.

계절의 바뀜을 수변에서 배우기

봄밤에는 물가 주변의 흙이 완만하게 부풀어 오른다. 낮에 받은 햇살이 땅속에 머물다 밤바람에 올라온다. 초봄에는 맥주를 차갑게 마시기보다, 손으로 감싸 온도를 조금 올린다. 찬 술과 찬 공기가 겹치면 위가 놀란다. 벚꽃이 번지는 시기부터는 수변길이 갑자기 붐빈다. 이때는 길 폭이 넓어지는 구간을 찾아 걷자. 교각 사이에는 서로의 속도가 뒤엉켜 마음이 조급해진다.

여름밤은 짧고 뜨겁다. 수변은 그나마 열섬에서 멀다. 모기가 걱정이라면 무향 스프레이를 발목과 손등에만 살짝 바른다. 목 주변은 땀과 만나 역효과가 날 때가 있다. 맥주의 차가움은 달빛보다 빠르게 사라진다. 가능한 한 그늘지고 바람이 통하는 벤치에 앉자. 등받이가 메탈이면 체온이 더 빨리 떨어지고, 나무면 느리게 떨어진다. 20분 이상 앉아 있을 계획이면 나무를 선택한다.

가을의 수변길은 걷는 사람에게 관대하다. 공기가 얇고 멀리 보인다. 이때의 맥주는 향이 살아난다. 가벼운 라거도 몰트 향이 도드라지고, 홉의 씁쓸함이 길게 남는다. 캔을 따서 절반은 걷는 동안, 절반은 앉아서 마시자. 두 장면의 맛이 다르다. 서서 마실 때는 이산화탄소가 천천히 위로 올라와 코를 세차게 자극하고, 앉아서 마실 때는 탄산이 입천장에 붙어 오래 머문다.

겨울에는 수변길의 사람이 확 줄어든다. 장갑과 넥워머는 필수고, 탄산은 더 차갑게 느껴진다. 이때는 알코올 도수가 낮은 맥주나 무알코올 맥주가 몸에 덜 부담된다. 얼어붙은 공기와 높은 도수는 궁합이 어색하다. 몸이 경직되면 균형 감각도 떨어지고, 미끄러운 구간에서 사고가 날 수 있다. 겨울밤에 걷다 보면, 내 발소리가 과장되어 들린다. 그 소리를 일부러 느리게 만들면, 경직도 풀린다. 박자를 넓게, 호흡을 깊게. 그 리듬 속에 캔의 무게가 가볍게 녹는다.

혼자 걷는 법, 함께 걷는 법

혼자 걷는 밤은 예민하다. 주변의 모든 것이 신호가 되기 쉽다. 이때 필요한 건 신호의 서열을 정하는 일이다. 1순위는 발밑, 2순위는 전방 10m, 3순위는 주변의 인물. 그 다음이 물소리와 바람, 마지막이 전화와 메시지다. 이 서열을 머릿속에 세워 두면, 놀랄 일이 줄어든다. 알림은 최소화하고, 음악을 듣더라도 한쪽 귀는 열어 두자. 맥주를 손에 들고 있을 때는 오른손잡이라면 왼손에 들고, 오른손은 난간이나 벤치 등을 짚을 여지를 남겨 둔다. 균형은 작은 습관에서 시작된다.

함께 걷는 밤은 더디다. 대화가 걷는 속도를 조절한다. 누군가와 걷는다면, 처음 10분은 나란히 걷되 반 발짝의 간격을 둔다. 이 간격은 서로의 보폭 차이를 흡수한다. 맥주는 한 캔을 나눠 마시는 편이 좋다. 각자 한 캔씩 들면, 손이 바빠지고 대화가 자주 끊긴다. 한 캔을 번갈아 넘어가게 하면, 말을 쉬는 타이밍도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나눠 마실 때는 입구를 닦을 수건이나 티슈를 챙기는 게 예의다. 별일 아닌 배려가 대화의 톤을 부드럽게 만든다.

광주 수변길의 작은 포인트들

광주에서 밤에 걷기 좋은 수변길은 몇 군데가 떠오른다. 구체적 위치를 모두 나열할 생각은 없지만, 자주 찾는 지점을 몇 가지 힌트로 남긴다. 영산강에서는 승촌보 상류 1km 구간에 은은한 조명이 길게 이어진다. 물안개가 오르는 날이면 한 겹 더 쌓인 듯한 느낌이 들고, 사진을 찍어도 과장되지 않는다. 풍암호수에서는 북서쪽 작은 섬 근처 데크가 조용하다. 발밑으로 물이 바로 닿지 않아 벌레가 적고, 뿌리 노출이 없어서 걸려 넘어질 일이 없다. 광천천은 서방시장 인근 다리 아래에 반사판 같은 수면이 생긴다. 교각이 바람을 막아주어 늦가을에도 생각보다 덜 춥다. 동림저수지는 차가 있어야 접근이 편하지만, 밤에 별을 보기엔 가장 낫다. 저수지 위로 떠 있는 별빛과 시가지 조명이 두 줄로 겹친다.

다만, 이 포인트들은 계절과 시간에 따라 표정이 바뀐다. 비가 온 뒤, 행사나 공사가 있던 주간, 혹은 인근 학교의 축제가 있던 날에는 분위기가 크게 달라진다. 그 변화를 즐기려면, 예상과 관찰을 번갈아 적용하면 된다. 오늘은 조용할 거라고 생각했다가, 사람들로 북적이면 호수에서 하천으로 방향을 바꾼다. 망설이는 시간에 발을 옮기자. 수변길의 장점은 대체 경로가 많다는 점이다.

맥주 고르기, 밤 산책과 어울리는 라인업

밤 산책에서 맥주는 가벼운 것이 좋다. 도수는 4도 전후, 탄산은 중간 이상, 향은 과하지 않게. 라거 계열이 무난하지만, 초가을에는 페일 에일이나 세션 IPA도 괜찮다. 홉 향이 선명하면 공기와 섞이는 향기 장난이 재미있다. 다만 쓴맛이 강하면 속을 더부룩하게 만들 수 있으니 도수와 IBU를 함께 본다. 숫자를 다 외울 필요는 없다. 몇 번 마셔 보고, 내 발걸음과 맞는 것을 고르면 된다. 밤 산책의 맥주는 취향 시험지가 아니라 리듬 조절 장치다.

맥주를 너무 차갑게 마시지 않는 것도 요령이다. 편의점 냉장고에서 갓 꺼낸 캔은 2도 안팎이다. 손에 쥐고 5분만 걷으면 4도, 벤치에 앉아 서너 모금 지나면 6도까지 오른다. 라거는 4도에서 6도 사이가 향과 탄산의 균형이 맞는다. 맥주를 들고 일정하게 걸으면, 자연스럽게 이 온도 구간을 통과한다. 굳이 온도계를 들이댈 필요가 없다. 혀가 기억한다.

몸과 마음의 속도를 맞추는 기술

밤 산책에서 가장 많은 실수는 속도를 잘못 맞추는 것이다. 하루의 잔열이 몸을 뒤흔들고, 그 여파로 발걸음이 빠르거나 과도하게 느려진다. 좋은 방법은 첫 7분을 체크인 시간으로 쓰는 거다. 아무런 결론을 내리지 않고, 오늘의 컨디션을 묻는다. 발목의 유연성, 햄스트링의 긴장, 어깨의 높이, 호흡의 깊이. 이 짧은 점검 뒤에야 그날의 맥주와 리듬이 정해진다. 몸이 타이트하면 라거 한 캔을 느리게, 만약 이미 안정적이라면 무알코올 맥주로도 충분하다. 간단한 기준인데, 지켜 보면 효과가 크다.

맥주의 마지막 모금은 앉아서 마신다. 걷는 동안 대부분의 감각이 외부로 열려 있다가, 앉으면 안쪽으로 접힌다. 앉아 있는 3분 동안 호흡을 길게 네 번만 한다. 마지막 숨을 내쉴 때 혀끝에 남은 쓴맛이 천천히 사라진다. 이 사라짐을 감지하는 훈련은 밤 산책의 피날레다. 사라짐이 분명하면, 다음 날 아침이 가볍다. 모호하면, 몸에 잔여감이 남는다. 그렇게 매일, 혹은 매주 몇 번씩 사라짐을 느끼는 사람은, 일과의 굴곡에도 덜 흔들린다.

안전과 자유 사이의 균형

밤 산책에 맥주가 더해지면, 늘 따라붙는 질문이 있다. 안전과 자유의 경계. 상식적인 선을 지키면 둘은 충돌하지 않는다. 혼잡한 구간에서 캔을 들고 뛰지 않기, 자전거 도로에 들어서지 않기, 가로등이 끊기는 지점에서는 이어폰을 빼기, 낯선 사람이 오래 접근할 때는 밝은 쪽으로 이동하기. 간단한 원칙들이 여유를 지켜 준다. 법적 문제는 지역과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니, 공공장소 음주에 대한 지역 규정을 사전에 확인하자. 수변길의 분위기는 대체로 관대하지만, 쓰레기 문제나 소란은 즉시 반감을 산다.

무엇보다 기억해야 할 건, 밤 산책의 자유는 타인의 자유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누군가는 그날 처음으로 조용한 시간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달려야 하는 계획이 있었을 수도 있다. 각자의 리듬이 어긋나지 않도록, 우리는 조심스럽게 공기를 나눠 쓴다. 그 조심성이 축적되면, 도시의 밤은 더 안전하고 넓어진다.

끝에 남는 건 풍경이 아니라 감각의 합

여러 해의 밤 산책 끝에 남는 건 특정한 장면보다 감각의 합이다. 수면 위로 퍼지는 빛의 흔들림, 손끝을 스치는 캔의 양각 로고, 멀리서 들려오는 자전거 기어의 얇은 소리, 논둑에서 한 번에 날아오르는 백로의 날개짓. 그 모든 것을 지나는 동안 내 안에서 쌓인 침착함. 광주의 수변길은 이 침착함을 만들어 준다. 강과 호수와 하천이 각기 다른 음색으로 도시를 식힌다. 맥주 한 캔은 그 음색에 얹는 작은 악기다. 없어도 곡은 이어지고, 있으면 곡의 질감이 깊어진다.

나는 종종 늦은 밤, 풍암호수 데크 난간에 팔을 걸치고 마지막 모금을 천천히 넘긴다. 호수 중앙의 조명이 점점 낮아지고, 산책객이 드물어지면, 도시의 소리가 멀어진다. 눈을 감았다 뜨면, 빛의 길이 살짝 달라져 있다. 이 변화가 좋다. 큰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작은 변화가 분명히 있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그날의 밤 산책은 제 역할을 다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빈 캔의 가벼움이 손에 남아 있다. 그 가벼움이 하루의 마지막 무게를 덜어 준다. 내일도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광주의 수변길은, 밤마다 작은 회복을 선물한다.